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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현장의 여성혐오, 영화 내용에도 반영된다”
최고관리자
16-11-07 16:03
1,813
 



터질 게 터졌다. #영화계_내_성폭력이라는 트위터 해시태그가 생성되고, 억눌려왔던 수많은 목소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씨네21>은 현재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며, 트위터 최전방에서 목소리를 또렷이 내거나 사려 깊게 듣고 있는 4명의 젊은 여성 영화인을 모았다. 배우 이영진·김꽃비, 안보영 PD, 남순아 감독이 그들이다.


이번 특집 이후에도 <씨네21>은 여성감독, 제작자, 각 분야의 스탭 등 각계에서 활동 중인 여성 영화인들의 후속 대담을 진행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예정이다.


 

안보영 PD

<할머니의 먼 집>(2015), <홀리워킹데이>(2015), <소꿉놀이>(2014), <잡식가족의 딜레마>(2014)를 비롯해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들을 프로듀싱했으며, 시네마달에서 <나쁜 나라>(2015), <다이빙벨>(2014) 등을 배급했다. 2015년 여성영화인상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배우 이영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로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자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영화 <로봇, 소리>(2014), <환상 속의 그대>(2013), <고령화가족>(2013), <요가학원>(2009), <아프리카>(2002) 등에 출연했다.



남순아 감독

<걷기왕>(2016)에 작가로 참여했으며, 법정의무교육인 성희롱 예방교육을 권해 한국영화계 최초로 실시하게 한 장본인이다. 다큐멘터리 <아빠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지?>(2015)로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 시선상을 수상했다.



배우 김꽃비

영화 <똥파리>(2009)로 제30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받았으며, 영화 <거짓말>(2015), <명왕성>(2013), <창피해>(2011), <여자, 정혜>(2005) 등에 출연했다.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들의 연대를 도모하는 페이스북 그룹 ‘찍는 페미’를 개설했다.





-현재 트위터에서 ‘영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의 제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례들을 봤나.


=이영진_ 일상적으로 겪어온 일들이다. 리트윗한 글 중에 가장 공감 갔던 건 “여배우는 자고 싶어야 한다는 말을 늘 듣는다”였는데, 나는 이 말을 미성년자 때부터 들었고 이제는 그런 말에 무던해질 대로 무던해진 20년차다. 그때 반발했어야 했고, 거부했어야 했던 건데… 이상한 죄책감이 들더라. 후배 여배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안보영_ 용기 있는 발언들이 집단적인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사회적 분위기에 큰 영향을 줬다.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준 사건이었다. 입이 터지면 비슷한 이야기들이 쏟아질 텐데 입을 다물고 있으니 몰랐던 거지. 한편으론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란 생각도 든다. 과거엔 어떻게 살아남을 거냐에 포커스가 맞춰졌다면, 지금은 발언하고 연대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김꽃비_ 쌓였던 것들이 터져나오고 있는 거다. 여성으로서 현장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성희롱 및 차별적 발언을 너무 많이 겪으며 살아왔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내가 예민하게 느꼈던 것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고, 현장에서의 불편함도 와닿기 시작했다. 영화현장에 페미니즘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다.

=남순아_ 나 역시 페미니즘이 대두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페미니스트로서 현장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영화인들이 사회에선 실컷 페미니즘 얘기하고 입바른 얘길 하다가 현장에 오면 모든 걸 제쳐두고 영화를 찍는 것만 우선하지 않나. 영화라는 대의를 위해 모든 게 희생되고, 약자들은 배려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의문이 계속 들더라. 이런 상황에서 영화계 내 성폭력을 지목하는 해시태그가 나왔을 때 정말 좋았고, 변화의 계기가 됐으면 했다. 지금 오히려 의문이 드는 건 문단이나 미술계에 비해 이야기가 적게 나오고 있다는 거다.

이영진_ 아마도 피해자들이 알려진 사람들일 수 있으니까. 내가 성추행당한 이야기를 하면, 가해자는 소거되고 ‘이영진이 성추행당했다’가 된다.




“공론화되지 않는 걸 보고 무력감을 느꼈다”

-현장은 촬영 장비들로 둘러싸인 일종의 섬이다. 내부의 규율로 돌아가는 폐쇄적인 곳이라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인 셈이다.


안보영_ 문단이나 미술 등 다른 예술 분야와 다르게 영화는 집단으로 일을 하잖나. 한 영화가 끝나면 다른 영화현장에도 가야 하니 조심스러울 거다.

김꽃비_ 영화현장은 스탭들이 계속 이동하니까 어딜 가도 겹치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입을 열었을 때 견뎌야 하는 파장도 크고, 사방에서 검증이 들어가게 된다. ‘꽃뱀 아니냐, 사실이 맞냐’ 이런 것들. 입을 연 사람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영진_ 그 안에선 성희롱이 일어나는 게 당연한 분위기다. 한 현장에서 기술 스탭들이 여배우의 가슴을 두고 ‘저년 빨통’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그때 나와 그 배우는 미성년자였는데. 너무 화가 나서 여기저기 이야기해봤는데 안 들어주더라. 공론화되지 않는 걸 보고 무력감을 느꼈다.

김꽃비_ 나도 미성년자 때부터 영화를 하면서 이런 분위기를 체화했다. 예전에 남자배우들이 많은 한 현장에서는 그들끼리 성적 농담을 대놓고 빈번히 했다. 한번은 ‘사면발니’ 운운하기에 불쾌해서 “사면발니요?” 했더니 “네가 사면발니를 어떻게 아냐”며 성적 단어를 말하는 초등학생들처럼 낄낄대더라. 가까이서 헤어·메이크업을 해줘야 하는 여성 스탭들도 괴로운 일이 많았다.

안보영_ 아마도 현장에서 의상분장팀이 그런 일에 가장 많이 노출될 거다.

이영진_ 지방 촬영이 있을 때, 예산이 부족하다보면 혼숙을 하는 경우가 아직도 있다. 이를테면 촬영팀에 여자가 한명 있으면, 그 한명에게 따로 방을 주지 않는 거지. 여성 기술 스탭들은 난처한 상황이 많다.

남순아_ 그런 일들은 상업이든 독립이든 마찬가지다. 한번은 헤드스탭이 불러서 방문을 열었더니, 팬티만 입고 있는 거다. 어떤 PD님이 독립영화 스탭들은 돈이 없어서 룸살롱도 못 가는 사람들이라며 옹호하던데, 내가 보고 들은 피해 사건은 대부분 독립영화 현장에서 일어난 거다.




-대개의 사례들이 현장의 수직적 질서 속에서 갑의 직위를 이용해 일어나는 것이다.



이영진_ 한국영화 내의 도제 시스템을 무시할 수 없다. 사수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시스템이잖나. 예를 들어 촬영팀 막내가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오픈해버리면 다른 촬영팀에도 못 들어갈 거다.

김꽃비_ 찍혀버리니까.

이영진_ 배우도 피할 수 없다. 예전에 작업했던 영화에서 사전에 얘기되지 않았던 목욕탕 신이 새로 생긴 거다. 그때 감독님이 현장의 모든 스탭들 앞에서 “모델 출신이니까 노출 부담 없을 것 같은데 가슴을 보여주는거 어떠냐”고 하는 거다. 스탭들은 나만 보면서 기다리고 있고, 압박감이 엄청났지만 끝내 거절했다. 그 후로 현장 분위기가 수습이 안 되더라. 같은 작품의 지방 촬영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시나리오가 없어졌는데, 한 남자 선배 배우가 자기한테 있다고 해서 그가 묵는 방을 찾아갔다. 그런데 내가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그고 뒤에서 확 끌어안더라. 너무 놀라고 화가 났다. 그냥 당했으면 폭로라도 하겠는데, 내가 거기서 유리컵을 괜히 깨가지고. (웃음) 선배고, 현장에서 계속 봐야 하기에 결국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끝날 때까지 그 현장은 지옥이더라.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표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도망만 다녔다.

남순아_ 여성감독의 위치에서도 그런 일을 당한다. 단편 작업을 할 때 연극계에서 유명한 60대 남성배우를 미팅한 적이 있다. 여성감독과 조감독이었던 내가 함께 갔는데, 자기 딸들 같다며 자꾸 손을 잡더니 둘의 가슴 크기를 비교해보자며 신체접촉을 하고, 여관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하더라. 가야겠다고 나서니 뽀뽀를 해야 보내주겠다고 우겼다. 같이 갔던 감독도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여성이었는데, 그 당시엔 둘 다 제대로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배우와 작품을 하지 않았지만 욕이라도 해주지 못한 게 후회된다.

이영진_ 현장에서뿐 아니라 미팅 및 술자리에서도 잦은 일이다. 최근에 간 시사회 술자리에서 겪은 일인데, 모 영화사 대표님이 손을 잡고 좋은 데를 가자고 하더라. 내가 이러다 요단강 가시는 수가 있다고 했지. 5분 뒤 그분은 사라졌다. 그렇게 손이 잡힌 상태에서는 오만 가지 수를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내가 성격대로 난리를 쳤을 때, 어떤 사달이 날까. 마음 같아선 인신공격이라도 하고 싶지만 좋게 얘기했다. ‘갑’에겐 정색하기가 힘들다. 분위기가 험해지면 피해는 나만 받을 거고. 대신 ‘웃으면서 까는’ 스킬만 자꾸 늘어가는 거다.





‘와꾸’에 대한 평가, 강요받는 ‘쿨함’

-이런 문제가 벌어져도 현장을 비롯한 영화계 내에서는 웃어넘기거나 묵인하는 카르텔이 조성돼 있지 않나.


김꽃비_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도 현장에서는 일정이 있고 시간이 돈이니까 문제제기를 쉽게 할 수 없다. 문제제기를 했을 때, 나 하나 때문에 현장이 올스톱되거나 지장이 생기면 내가 잘못한 게 되니까. 피해자는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고, 그에게 손가락질이 돌아오는 거다.

이영진_ 남성들은 자기검열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일례로, “우리 현장은 일만 열심히 하라고 여자들 ‘와꾸’가 이래” 같은 말들을 일상적으로 웃으며 한다. 어느 수위까지 이야기하고 행동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의 언행을 검열하는 데 학습 자체가 안 됐다. 오히려 당하는 여성들은 어디서부터 웃어넘겨야 하고,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말이다. 현장에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있을 때 지적하거나 제재하는 남자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동조하거나 웃지만 않아도 훌륭한 남자다. (웃음)

남순아_ 촬영팀이 여배우의 특정 신체 부위를 줌인아웃하면서 낄낄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촬영팀 막내랑 이야기를 해봤는데, 자기도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말할 수 없었다더라. 남성들은 설령 마음속으론 동조하지 않는다 해도, 이럴 때 함께 웃고 떠들면서 남성성을 획득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기득권의 질서로 편입하는 거다.

김꽃비_ 그게 젠더 권력이다. 웃고 대상화할 수 있는 성적 권력을 가졌다는 것.




-반면 여성들은 늘 성적 대상화나 성희롱에 있어 ‘쿨함’을 강요받지 않나. 사실 엄청난 인내를 요하는 일인데.


남순아_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속으로 ‘세 번째 이러면 말하자’라고 카운팅을 하며 꾹 참는다. 그러다 계속 말 못하고 ‘다섯 번째 되면 말하자’, 이렇게 생각하지. (웃음)

이영진_ 남자들이 주를 이루는 현장에서 이만한 성적 농담은 쿨하게 넘겨야 한다는 강요를 늘 받는다. ‘남자란 원래 본능적인 동물이라 그렇다’고 하면서 이상한 게 아닌 걸로 만들어버리니까. 방어만 했는데도 어느새 나는 ‘기센 년’이 되어 있더라. (웃음) 그러면서 항상 여배우가 까칠하다고 한다.

김꽃비_ 사실 여배우는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다. 까칠하게 만든 게 누군가. (웃음)

이영진_ 여배우가 나긋나긋하지 않으면 공공의 적이 된다. 그런데 정말 여배우들이 비위 맞추기 어렵고 까칠할까? 나는 여배우들과 작업을 많이 한 경우다. 그런데 그들 모두 남자배우들보다 훨씬 순하고 착해서 호흡을 맞추기 편했다. 여성감독인 강진아 감독과 <환상속의 그대>(2013)를 했을 때도 행복했다. 하루 종일 작품과 캐릭터 얘기만 할 수 있으니 정말 좋더라. 반면 남자감독을 두 시간 이상 만나면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저녁 먹고 이야기하자고 하면, ‘아니요, 저녁은 알아서 먹겠습니다’ 하지. (웃음) 내가 사적으로 다가올 영역을 안 만들었다는 이유로 까칠하다고 하는데, 일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안보영_ 우리는 현장에 친분을 쌓거나 연애를 하러 온 게 아닌데, 동료가 아닌 여자로 보는 시선이 있다.

김꽃비_ 난 원래 사람 좋아하고 잘 웃고 금방 친해지는 성격인데, 영화 일을 하면서 벽을 치게 됐다. 웃으면 함부로 대할까봐 잘 웃지도 않고 정색하고.

이영진_ 잘 웃어주면 문제가 일어나도 ‘쟤가 날 꼬였다’가 되는 거지. 그래서 나는 안 웃는다. (웃음)




-피해자를 예민하고 유난하게 치부하는 2차 가해의 시선도 만연해있지 않나.


이영진_ “네가 오해한 거 아니고? 네가 여지를 준 거 아니고?” 이런 말들은 피해자가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나섰는데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말들이다. 그런 반응이 왔을 때 피해자 입장에선 어떤 리액션도 할 수 없다. 내가 성희롱을 당했다는데 누가 “네 나이에 누가 플러팅하면 고맙게 받아들여야지”라는 식으로 나오면, 내가 아무리 되받아치는 것에 익숙해졌다지만 할 말이 없다. ‘멘붕’이 온다.

남순아_ 2차 가해는 2차 가해라고도 할 수 없는 또 다른 가해라고도 하더라. 성폭력을 당했는데 공동체에서 또다시 부정을 당한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나. 가해자와 피해자 일대일 관계에만 머물면, 피해자는 불안해지고 가해자의 사과도 성의 없기 일쑤다. 공동체 안에서 사과를 받는 건 피해자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인정을 받는 중요한 행위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오히려 피해자를 탓한다면 그는 얼마나 절망스럽겠나.

김꽃비_ 사회적 차원에서의 교육과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성폭력 피해자들부터 의심하고 증명을 하라고 추궁하는 게 또 다른 가해가 될 수 있다.




누가 일하는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가

-성희롱, 성폭력 이전에 여성혐오가 뿌리 깊게 자리한다. 성역할을 강요하는 ‘여배우는 현장의 꽃이다’ 같은 말들도 있다.


남순아_ 여성을 꽃으로 보는 비유 자체가 구시대적이다. 여성학자 정희진님의 강의를 들은 적 있는데, 여자가 꽃이라는 남자한테 “여성이 꽃이면 당신은 뭐죠? 뿌리?” 하고 물으니 그가 “사람”이라고 대답하더라. 남자들이 여자들을 얼마나 대상화되는지 알 수 있는 사례였다. 언젠가는 다큐멘터리계의 대부 같은 분이 나한테 “순아, 더이상 어리지 않은 거 알지? 스물여섯은 꽃으로 치면 꺾여서 시든 나이야”라는 거다. 내가 시들었으면 감독님은 화석이라고 하려다가 참았다. 왜 나만 상식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웃음)

이영진_ 나도 똑같은 말을 몇번 들었다. 한 친구는 “꽃은 보되 만지지 말고, 만지되 꺾지 말라”고 배웠다더라. 나름 여성을 위한다고 하는 소리같은데, 왜 우리가 저들의 꽃이냐. 누가 그렇게 규정했나. (웃음)

김꽃비_ 온정적 여성혐오다. 여배우들에겐 특히 심하다.

이영진_ 이미 꺾이고 밟히고 살아남은 사람들한테 꽃 운운하면서, 순대좀 먹었다고 “여배우가 이런 것도 먹어?”라고 하지. (웃음) 나는 상냥하거나 사근사근한 배우가 아니다. 남자배우 중에도 나처럼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사람도 있을 텐데, 그들이 그러면 그건 성격이 된다. 그런데 여배우가 잘 안 웃으면 문제 있는 사람이 되는 거다.

남순아_ 배우만 그런 얘길 듣는 건 아니다. 나는 스크립터를 많이 했는데, 스탭들이 연출부의 꽃은 스크립터, 제작팀의 꽃은 회계라고 그러더라. 여성 인력이 많은 분야를 꽃이라고 하는 거지. 나는 19살 때부터 영화를 시작했는데, 어리고 체구도 작아서 동등한 인력이 아닌 산책 나온 강아지 취급을 자주 당했다. 내가 만만해 보여서 함부로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면 스스로를 탓하게 되더라. 가죽재킷도 사보고 스모키 화장도 해봤는데, 이렇게 해야만 나를 지킬 수 있는 건가 싶어 씁쓸했다.

이영진_ 반대로 나는 가죽재킷을 즐겨 입고 센 얼굴에 키도 크다. 그런데 이러면 또 다른 방식의 괴롭힘을 당한다. ‘이러면 연애 못한다. 여자가 여자다워야지’ 같은 식의 고전적인 성 역할을 강요하는 말들 말이다.

김꽃비_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여배우는 이래야 한다는 편견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최근엔 코와 입술에 피어싱을 했다.



-영화계 내 성희롱과 성폭력 사례들은 이렇게 뿌리 깊게 자리한 ‘여성혐오’에서 출발한 것일 터다. 현장 내 여성혐오와 편견은 여성에 대한 유리 천장으로 이어질 테고.


이영진_ 우리나라에 연출 전공을 한 여학생이 얼마나 많고 그들이 연출한 단편이 얼마나 많은데, 정작 상업영화판에 여성감독은 드물지 않나. 게다가 입봉할 땐 로맨틱 코미디를 강요받는다.

안보영_ 오래 일하는 여성 영화인들이 별로 없는 것은, 그들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영화계 내 기혼 남성은 많아도 기혼 여성은 별로 없지 않나.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대부분 영화를 접는다. 가족이라는 구조 자체가 여성에게 불평등하고,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영화를 하긴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나가떨어진 언니들을 많이 봤다. 일에 대한 의지가 있어도, 경력이 단절되면 현장에서 다시 받아주지도 않는다.

남순아_ 한 여성 스탭이 촬영팀에 지원했더니, 여자는 안 된다고 한 경우도 있었다. “여자가 편집이나 하지 체력적으로 되겠냐”고 물었다더라. 편집기사한테도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데. (웃음) 여자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성폭력 사건, 분명한 처벌 있어야

-현장에 짙게 깔린 ‘여성혐오’는, ‘여성혐오’에 기반한 영화들로 이어진다.


이영진_ 여성 역할의 다양화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한국영화엔 여성이 성녀 아니면 창녀밖에 없다.

남순아_ <걷기왕>을 할 때 “여고생보다 남고생이 더 나을 텐데, 투자도 잘될 텐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여성주인공이면 기본적으로 페널티를 받는 거다.

이영진_ 언젠가 한 감독님에게 감독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더니, “난 멜로는 안 하는데”라고 하시더라. 나는 멜로 빼고는 다 잘할 수 있는 자신이 있는 배우인데 말이다. 나는 남자배우가 내 손을 낚아채 벽 치기 하는데 눈만 깜빡깜빡 뜨고, 이런 건 정말 잘할 자신이 없다. (웃음) 모 매체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같은 작품이 못 나오는 이유는 여배우들이 얼굴에 숯칠을 안 하려 해서 그렇다는 얘길 하신 분도 있더라. 어떤 여배우가 이런 작품을 안 하겠나. 나만 해도 당장 하고 싶다. 삭발도 문제없다.

김꽃비_ 난 한국판 <고스트버스터즈>를 만들고 싶다. 제사 지낼 때 절은 남자만 하는데 음식은 여자가 다 만들지 않나. 한국에 맞게 로컬라이징해 여자들이 조상신을 때려잡는 내용이다. (웃음)

남순아_ <걷기왕>엔 의사 두명이 출연한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게 남자배우를 찾고 있더라. 백승화 감독님에게 성별이 지정되어 있지 않은데 여배우를 캐스팅해도 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김꽃비_ 시나리오에 특별히 남자는 성별이 따로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여자라면 여사장, 여의사와 같이 표기되고 거기엔 특별한 이유나 사연이 있어야 하더라. 기사의 헤드라인에도 가해자, 피해자가 남성이면 표기가 따로 안 되듯이.

안보영_ 시나리오 개발을 할 때,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해도 여성으로서의 서사가 구축되지 않고 여자라는 라벨링만 있는 영화가 많다. 영화 제작과정에서도 여성 캐릭터가 왜곡되거나 삭제되거나 생략되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걷기왕>은 크랭크업 전에 스탭들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했다. 법정의무교육이고 실시하지 않을 시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함에도, 거의 최초로 시행된 사례다.


이영진_ 전엔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더라. 연기자 후배들이나 이제 막 시작하는 스탭들한테는 큰 위로가 되겠구나 싶었다.

남순아_ 현장에서 나 같은 최약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고민을 했고, 영화산업노조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니 법정의무교육이어서 하자고 제안했다. <걷기왕>이 첫 사례라는 게 놀라울 뿐이다.

김꽃비_ 스탭들을 다 모으기 어렵다는 핑계도 있던데, 고사 지내는 날 하면 된다. 크랭크인 전 고사에는 한명의 스탭도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성희롱 예방교육은 왜 참여가 어렵다는 건가. 차기작인 <임을 위한 행진곡>에도 교육을 제안해 시행하기로 했다.

안보영_ 이번에 제작사를 차렸는데, 앞으로 내가 제작할 영화에서는 전부 시행할 거다. (웃음)



-김꽃비씨는 페이스북에 페미니스트 영화, 영상인들을 모은 ‘찍는 페미’ 그룹 페이지를 개설했다.


김꽃비_ 마피아 게임에서 마피아들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 같은 그런 맥락에서 만들었다. (웃음) 내 주변에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옆에 그런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용기가 나니까. 어떤 현장에 갔을 때, 이 그룹에 가입해 있는 영화인들이 있으면 좀 안심이 되고 비빌 언덕이 있는 것 같지 않겠나. 페미니스트 영화인들끼리 연대하면서 용기가 생기고 변화의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남성도 페미니스트일 수 있고, 배제하지 않을 거다. 아직 잘 몰라도 페미니즘을 알아갈 의지만 있다면 환영한다.

남순아_ 트위터에서 보고 바로 가입했다. 현재 551명이 가입했는데, 내가 피해를 당해서 공론화했을 때 적어도 550명은 나를 지지해주지 않겠나. (웃음) 각개전투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운데,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다.



-여성영화인모임에서 관련 대책 기구 마련을 논의하고 있다더라. 민우회 등 여성단체들과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준비 중이라고.


남순아_ 영화산업노조에서 신문고를 시행하고 있지만, 노조는 촬영팀 위주로 되어 있지 않나. 아무래도 거기는 남성 스탭들이 주축이니까. 편하게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한데 정말 잘됐다.



-여성 영화인들로부터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영화계 내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성폭력을 뿌리뽑기 위해선 무엇이 가장 시급할까.


김꽃비_ 가장 중요한 건 근본적인 분위기 개선이다. 현장에서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배려받아야 할 것들을 배제하는 게 당연해져선 안 된다. 비용과 시간이 더 들더라도, 개인을 존중하는 문화가 생겨야 한다. 여성 한 개인이 피해를 당했을 때, 그가 피해 사실을 얘기한다고 해서 방해된다고 타박하는 게 아니라, 그 한명을 존중하며 사태를 해결하려는 문화가 생겨야 한다.

이영진_ 인식이 바뀌는 것도 중요하고. 서울시 다산콜센터에서 성희롱 전화가 많이 걸려왔는데 고소하니 그런 일이 확 줄었다더라. 고소가 사람을 만든다. (웃음) 이상적인 희망에만 기댔다가 잠깐만 방심하면 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현장에서 성희롱이 일어나면 처벌받을 수 있게 제도화가 되어야 하고, 눈치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안보영_ 왜 여성혐오와 성희롱을 하면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 그냥 공부하고 외웠으면 좋겠다. (웃음)

남순아_ 사실 나는, SNS상의 폭로들을 비롯해 이런 자리도 만들어지고 나 같은 ‘피라미’도 목소리를 내는데 배급사나 제작사, 힘 있는 영화인들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쉽다. 요즘은 이슈들이 금방 가라앉고 휘발되는데, 유야무야될까 걱정이다. 우리도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겠다, 라는 마음가짐이 아닌 선언이 필요하다. 나아가 성폭행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 혼자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작품의 제작사가 책임을 지고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영진_ 시간이 필요하다. 성차별적 문화에서 오래 있던 분들이 용기를 내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다. 나도 이제야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 않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싸움이 될 거고, 그럴수록 우린 연대해야 한다. 무너지지 않는 심지를 갖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힘을 주는 일. 당연한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출처: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5575